마흔, 더 오래 더 아름답게 일하는 법 #4 내가 오래 기억할 후배들 이야기
글
한다혜 메이크업프로팀
나답게 일하고 싶은 마흔의 시선으로 한 분야에서 꾸준히 쌓아 온 시간 속에서 발견한 깊고 새로운 아름다움(NEW BEAUTY)을 다섯 번의 칼럼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저는 영영 ‘권위 있는 선배’는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중간관리자가 되고, 열 살 이상 어린 후배들을 연달아 만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다움’이란 가면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을수록 관계는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요.
처음엔 긴장했습니다. 이모티콘을 어떻게 찍어야 어색하지 않을지, 제 말투가 혹시 올드하게 들리진 않을지, 직함이 요구하는 ‘선배다움’을 얼마나 보여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너무 친해지면 흐트러질까, 너무 딱딱하면 벽이 생길까. 선배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이 제 어깨를 누르곤 했죠.
그런데 후배들은 그런 경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더라고요. 먼저 웃고, 먼저 마음을 열었습니다. 제 어색함마저 덮어버리는 그들의 자연스러움 속에서, 서서히 힘을 뺄 수 있었어요. 완벽한 선배일 필요는 없구나. 그냥 옆에 서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 있어도 괜찮구나. 그 사실이 저를 안도하게 했습니다.
웃음이 일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날들
1 S, 지금을 사는 단단함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S입니다. 몇 년 전, 제 생일날 첫 출근했던, 저보다 열 살 어린 계약직 조연출. 면접장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묘하게 단단한 기운을 풍기던 아이였습니다. “경험이 부족해 실수할 수도 있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라는 담담한 대답은 꾸밈이 없었어요. 첫 출근 날부터 애쓰거나 불필요하게 긴장하는 모습 없이 그냥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선배 역할을 억지로 연출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원래는 조용하던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S가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연결해 틀면서 말했습니다. “요즘 이 노래에 꽂혔어요.” 아무렇지 않게 좋아하는 것을 나누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걱정하지도 않는 아이. 그때 저는 늘 ‘이 프로젝트가 잘 될까, 다음 기획은 어떻게 해야 하지’와 같은 불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S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창밖 풍경과 음악이 겹쳐지던 그날, 저는 그 단단함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촬영장의 공기 속에서 자기만의 리듬을 찾던 S
물론 작은 충돌도 있었습니다. 기획 큐시트 표를 만들게 했는데, 정렬이나 테두리가 엉성했던 거예요. 내용은 충분했지만, 마지막 디테일이 아쉬웠습니다.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은 복사 한 장에서도 다른 결이 보인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조금만 더 시킨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면 좋겠다. 마지막 디테일에 힘을 더하면 결과물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 순간, 공기가 뻣뻣해졌습니다. 혼내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철렁했죠. 신입 시절에는 지적을 받을 때 얼마나 위축되는지 잘 아니까요.
다행히 S는 묵묵히 듣고 더 꼼꼼하게 일을 해냈습니다. 며칠 뒤 다시 받은 자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정렬은 매끄럽고, 보기에도 단단했습니다. 상처받고 움츠러들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였습니다. 지적을 곱게 삼켜 성장으로 돌려놓는 그 태도는 제게도 배움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요.
짧은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주 만났습니다. 카페 구석에 앉아 각자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곤 했죠. 일은 각자의 것이었지만, 같은 공기를 나누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은 엉뚱한 퀴즈쇼 공지를 발견해 함께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큰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문제를 달달 외우며 차를 몰고 현장까지 가는 길은 왠지 특별한 소풍 같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문제로 초반에 탈락하고 말았지만, 탈락석에서 마주 앉아 웃음이 터졌던 그 순간이 진하게 남아있어요.
S와 함께라면, 이상한 걸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이후에도 이상한 이벤트나 소소한 기회를 발견할 때면 서로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함께 있어도,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일상에 작은 웃음을 불러오는 친구. 짧은 동행이 남긴 선물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2 J, 작은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
S가 떠난 자리엔 J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읍 단위의 작은 지역에서 올라온, 아주 마르고 위태로워 보이는 첫인상. 긴장한 티가 났고, 목소리도 작았습니다. “서울은 처음이에요. 자취방을 급하게 구했어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쓰였습니다. 이 큰 도시에, 저 어린 나이에 혼자 잘 버틸 수 있을까.
J가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한 첫날, 사실 제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메일함 숫자가 신경을 긁고, 머리는 무겁게 눌려 있었죠. 그런데 문득, 피곤에 섞인 제 건조한 말투 한마디가 이 아이를 잔뜩 움츠러들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기분이 묘하게 저를 멈춰 세웠죠.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최대한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첫 출근했나 봐요. 긴장 많이 되죠?”
짧은 인사였지만, J의 얼굴에서 스르륵 안도의 기색이 번졌습니다. 그 순간 알았습니다. 선배라는 건 결국, 일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요.
첫 퇴근 날, J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운전하는 동안 저는 교육용 멘트 대신 사소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밥도 맛있고, 임직원 할인도 쏠쏠해요.” “팀장님은 좀 꼰대 같아 보이지만, 엄청 다정한 분이에요.” 그 말에 조금씩 안심하는 표정을 보며, 제 마음까지 풀렸습니다. 누군가의 하루에 슬쩍 들어가 작게나마 길을 밝혀주는 일. 생각보다 훨씬 큰 기쁨이었어요.
그 뒤로 우리는 회사 앞 산책로를 손을 잡고서 종종 함께 걸었습니다. 날씨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편의점 신제품을 두고 웃기도 하면서. 마치 언니가 된 것처럼, 이 아이가 서울에서 혼자 헤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곁을 지켰습니다. 산책길은 짧았지만, 그 사이에 쌓인 공기에는 묘한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J는 강했습니다. 꼼꼼했고, 냉철했고,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회의 시간에 점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저도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저는 욕심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J는 금세 그 방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동시에 다음 기회를 요청하는 단단함이 든든했습니다.
몇 달 뒤, 제가 회사를 떠나던 마지막 날, J는 손바닥만 한 카드에 글씨를 빼곡히 적어 건넸습니다. “다혜 님은 제가 작은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집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나약한 시절을 함께 건너왔습니다. J가 일의 실체를 알아가며 목소리를 찾아갈 때, 저는 누군가를 지켜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J가 준비해 준 깜짝 퇴사파티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한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의 우정이었습니다. 퇴근길의 대화, 산책길의 공기, 마음을 다잡게 해준 짧은 인사말들. 그 사소한 순간들이 J를 붙잡았고, 동시에 저도 버티게 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값졌는지는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오래 볼 사람이라는 확신. 언젠가 J도 또 다른 후배에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리라는 믿음. 그것이 제가 J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3 B, 위기를 건너며 동료가 된
아모레퍼시픽에 입사해 처음 만난 조연출 B는 제게 작은 구원 같았습니다. 경력직으로 들어와 첫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이리저리 손을 대다 보니 클립 파일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레이어는 수십 겹으로 겹쳐 있던 상태였고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경력직으로 온 제가 이런 기본적인 실수 앞에서 무너진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그 순간, 모든 걸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쳤습니다.
그때 B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다혜 님, 지금 버전 충분히 재밌어요. 조금만 손보면 살릴 수 있어요.”
그 말 한마디가 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자정까지 나란히 앉아 파일을 정리했습니다. 이름 없는 레이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엉켜 있던 타임라인을 풀어내고, 지저분하게 끼워진 영상 조각들을 다시 맞췄습니다. 키보드 소리와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던 김, 모니터 불빛만이 남은 새벽의 공기 속에서, 두려움 대신 이상한 집중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우리는 영상을 완성했습니다. 첫 업로드를 마친 날 집에 돌아와서도 장면과 대사를 외울 정도로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B가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젯밤 계속 봤는데, 진짜 재밌게 나온 것 같아요.”
그 말에 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같은 피로를 견디고 같은 기쁨을 나눈 순간, B는 더 이상 인턴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동료였습니다.
붐마이크를 번쩍 든, 여려 보였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B
그 뒤로 B는 종종 메신저에 귀엽고 과장된 이모티콘을 붙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화면 가득한 하트와 괄호 속 감탄사들. 피곤하던 오후, 그 작은 알림창 하나가 마음을 풀어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저를 “다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엔 오타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지은 애칭이었습니다. 소박한 별명 하나가 신뢰의 표시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결국 제 닉네임을 아예 ‘다헨님’으로 바꿨습니다. 누군가의 장난 같은 애정이 제 일상을 환히 밝혀준 거죠.
그런 사소한 호들갑들이 일의 온도를 바꾸었습니다. 회의 시간에 B가 던진 짧은 농담이 긴장을 풀었고, 작은 칭찬 하나가 제 태도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경험상, 다정한 말 한마디가 실수 두어 개쯤은 덮어주곤 하는 걸 알아요. B 덕분에 그 진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죠.
이따금 B는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다혜 님, 저는 앞으로 뭐가 될까요?”
그 질문 앞에서 저는 늘 잠시 멈추었습니다. 제 또래였던 제 모습보다도, 이 아이가 훨씬 더 꼿꼿하고 진정성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을 돕는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동시에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저는 장난스럽게 “포브스 20대 리더 1위는 네 거야”라고 답했지만, 속마음은 전부 진심이었습니다. 어떤 길을 가든 스스로 길을 만들 줄 아는 사람. 저는 그 길에 작은 이정표 하나쯤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돌아보면 B에게서 배운 건 단순히 기술적인 협업이 아니었어요. 지쳐 있던 순간을 함께 견디며,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경험을 오래 잊지 못할 겁니다.
5 오래 남는 것은
돌아보면 회사는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했을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힘은 사람에게서, 관계에서 나왔습니다. S에게서는 현재를 즐기는 단단함을, J에게서는 욕심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을, B에게서는 위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신뢰를 배웠어요.
덕분에 저는 덜 단단하고, 덜 차가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이 괴롭지 않은 이유. 바로 이 얼굴들 덕분이었던 거죠.
이들이 제게 그랬듯, 나도 누군가의 하루를 덜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기대. 그 작은 마음이 저를 여전히 이 세계에 머물게 합니다. 아마도 세대 차이라는 건 단절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다리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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