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번역된, 단일하지 않은 말의 맛 - AMORE STORIES
#임직원칼럼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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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번역된, 단일하지 않은 말의 맛

Columnist | 아모레퍼시픽그룹 임직원들이 직접 작성한 칼럼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번역의 역사 제3화. 마침내 번역된, 단일하지 않은 말의 맛




칼럼니스트 | 아모레퍼시픽 인재개발팀 이환희 님



#1. 너무나도 다양한 미묘한 선택지,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
몇 해 전 인터넷상에서, 첫 칼럼에서 잠시 언급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출판사별 첫 문장 번역을 비교한 게시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대한 개츠비>만큼 다양한 이의 손에 의해 번역된 작품도, 문학 번역사에 많은 논란을 야기한 작품도 없으니까요.

논란은 유명 소설가인 김영하 작가가 문학동네 출판사 버전의 번역을 맡으며 시작되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기존의 번역본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습니다. 비판은 반박을 낳고, 김영하 작가의 번역본도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죠. 그 과정에서 많은 출판사가 “우리의 개츠비가 진짜 개츠비다”라는 식의 마케팅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화제가 되면서 인터넷상에서 그 게시물이 화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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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문학동네 버전 <위대한 개츠비>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위의 첫 문장에 대한 10개 이상의 한국어 번역본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No.번역문출판사 / 번역가
1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하나 해주셨는데, 그 충고를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말이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열림원 / 김석희
2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민음사 / 김욱동
3내가 아직 젊고 남의 말에 곧잘 발끈하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셨는데, 그 후로 나는 그 충고를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남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이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네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셨다.범우사 / 송판식
4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더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평생 마음에 간직할 조언 하나를 해주셨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땐 이 사실을 기억하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위즈덤하우스 / 서민아
5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문학동네 / 김영하


번역가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는 지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표에 굵은 글씨로 처리한 부분입니다.

1. 첫 문장에서 ‘vulnerable’이라는 단어의 번역
2. 첫 문장에서 ‘advice’ 뒤 ‘that’ 이후의 문장에 대한 번역
3. 두 개의 따옴표로 구분되어 있는 아버지의 조언에 대한 번역
4. 아버지에 대한 높임말 사용 여부

1.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vulnerable’은 “~(에) 취약한, 연약한(신체적·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의 의미입니다. 3번 범우사판과 5의 문학동네판에서 화자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이 들어간 부분, 그리고 1번 열림원판에서 ‘어리고(young)’과 ‘여리던(vulnerable)’ 앞에 각각 ‘나이도’와 ‘마음도’를 넣어 운율을 만든 부분이 눈에 띕니다.

2. 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I have a lipstick that will make me look pretty.”라는 문장의 ‘that’은 앞에 나온 ‘lipstick’입니다. 두 가지 방식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먼저 ‘that’ 뒤에 나오는 말들을 원래의 명사(lipstick) 앞에 자연스럽게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예쁘게 보이게 해줄 립스틱을 가지고 있다.” 같은 식이죠. 한편 원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원문에도 더 적합하고 읽기에도 더 편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립스틱이 있는데 이것(립스틱)이 나를 예쁘게 보이게 해줄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위에 예로 든 문장은 앞뒤 문맥이 없는 단문이라 전자의 방식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처럼 길고 문맥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4번 위즈덤하우스판을 제외하고는 모두 후자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는 아버지가 해주신 충고가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문장을 끝낼 수 있죠. 반면 4번의 방식은 아버지가 조언을 해주신 것 자체에 방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3. 영어 소설에서의 등장인물 대사나 영어 기사에서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를 보면 [“문장 1”, She/he said, “문장 2”]와 같은 식으로 대사나 말을 잘라서 말한 이를 중간에 삽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어 소설이나 기사에는 없는 방식입니다. 이번 번역의 경우 크게 세 가지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원문의 순서를 똑같이 따라 한 경우가 2번의 방식입니다. 이런 형식의 번역을 선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방법이야말로 원문의 형식을 훼손하지 않은, 가장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의 ‘He told me’를 앞으로 뺀 후 문장을 합쳐서 번역한 3번과 4번의 경우가 소설이나 기사를 번역할 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입니다. 원문의 모든 요소를 살리되, 한국어에서 쓰지 않는 형식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장 무난하다고 평가됩니다.

1번과 5번의 경우 아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He told me)’를 생략했죠. 원문을 훼손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경우도 ‘He told me’를 완벽하게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2,3,4번 모두 ‘He’를 ‘그’라 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했는데, ‘He’나 ‘She’ 같은 대명사 표현을 잘 쓰지 않는 한국어에서는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문에서는 한 번밖에 쓰이지 않은 ‘아버지’라는 표현을 두 번 쓰게 되었지요. 그러니 ‘He told me’라는 표현 자체를 생략한 것을 원작에 대한 훼손이라고까지 여길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4. 다른 번역과 달리 5번에서는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해주셨다’, ‘말씀하셨다’ 등의 객체 높임말을 쓰지 않은 것이 눈에 띕니다. 김영하 작가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기존 번역본에 대해 비판한 주요 내용은 “원작의 생동감이 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문장을 간결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화자의 성격을 다른 번역가들과 달리 해석했을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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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버전 표지. 작가 이름보다 번역가 이름을 크게 인쇄한 표지를 통해 당시 과열된 번역가 마케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이 잘된 번역이고 잘못된 번역인지를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200페이지가 넘는 1인칭 시점의 소설에 있어서, 화자의 성격, 심리 변화 등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원문의 뉘앙스를 각각의 번역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단어 선택, 말투 선택, 간결성의 정도 등을 통해서 작품과 화자, 그리고 언어를 대하는 번역가의 태도가 미묘하게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 <헤어질 결심>의 미묘한 번역에 거는 기대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최신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2022년 6월 개봉작 <헤어질 결심>입니다. 아직 국내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은 이 영화 영문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제한적으로나마 해보려고 합니다. 마침 이 영화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언어의 차이’와 ‘번역 애플리케이션’에 대해서도 이야깃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최근 개봉 작품인 만큼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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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이 2022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 호평받으면서, <기생충> 번역가가 작업한 영문 번역도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한국어가 서툰 중국 출신 여성 ‘서래(탕웨이 분)’가 주인공인 만큼, 번역에서 그 ‘서툶’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문맥에 맞지 않아서, 때로는 한국 사람보다 오히려 사전적으로 정확해서 어색한 ‘서래’의 어휘 사용이 극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주요 요소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는 특히 시나리오에 사용된 모든 어휘와 표현의 세심함에 굉장히 집착한 작품임을 자연스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번역가에게 부담스러웠을 작품입니다.

<기생충>의 번역을 보는 재미가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짜파구리’ 등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표현들의 재탄생이었다면, <헤어질 결심> 번역의 묘미는 예컨대 ‘마침내’라는 표현을 ‘끝내’나 ‘결국’과 같은 유의어와 어떤 차이가 나도록 번역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잘못 쓰였을 때와 문맥에 맞게 쓰였을 때 그것들이 모두 같은 단어로 번역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유사한 의미의 단어들과는 다른 뉘앙스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든 디테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요구가 번역가에게 가혹할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그것이 핵심입니다. 보통 ‘유일한’이라는 표현을 쓰는 상황에서 ‘단일한’이라는 단어를 쓰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어색한, 한국어에 서툰 중국 여인의 말은 어떻게 번역이 될까요?

칸 영화제 수상 소식을 통해 짐작해보건대, 영화 속 ‘미묘한 말의 맛’이 자막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잘 전달된 것 같습니다. 외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특히 시나리오에 대한 호평이 많았다는 점도 고무적입니다. 달시 파켓 번역가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박찬욱 감독과 소통한 것도 번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번역가가 원작자와 직접 소통을 한다는 것은 분명 큰 차이를 만들 테니까요. <위대한 개츠비> 번역가 중 누군가가 피츠제럴드 작가와 직접 소통을 한 후 번역본을 냈다면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열 권 넘게 나오지는 않았겠죠.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일부 주요 표현이나 언어 유희적인 표현에 대한 번역이 조금 공개되었는데,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곳에는 소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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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관점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는 영화 속 ‘번역 앱’입니다. ‘서래’는 ‘해준(박해일 분)’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한국어를 서툴게 쓰지만, 어렵거나 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음성 인식을 통한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합니다. 영화에서 사용한 애플리케이션의 수준을 보면, 번역이라는 행위를 인간이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제가 중국어를 알아듣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단 번역된 문장 자체가 너무나 유려합니다), 다행히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실제 애플리케이션을 구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 속에서 애플리케이션이 오역을 하기도 하고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기기를 통해 주인공들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호 간 감정의 연결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번역되고 감정이 교류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소개한 요소 외에도 여러모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인데, 칼럼이 게시될 시점에도 상영하고 있다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들은 꼭 보실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며 – 번역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나라의 이상한 칭찬 문화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좋은 풍경을 보고는 “그림 같다”고 하면서 잘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진짜 풍경 같다’고 한다든지, 맛있는 집밥에 대해서는 “파는 밥 같다”고 하고 맛있는 식당에 가면 “집밥 같다”고 한다죠.

‘좋은 번역’에 대해서도 “번역이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많이 하는데, 그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번역된 콘텐츠는 필경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부터 비롯되었을 텐데 어떠한 이질감이나 낯섦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정말 잘한 번역이냐는 것이죠. 그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번역가로서는 번역할 문장의 원문에만 지나치게 집착해서 한국어로 어색한 문장을 만들어서도 안 될 것이고, 가독성 내지는 완결성에만 집착해서 과도한 해석과 수정을 해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언제나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고통받아야 할 번역가들을 유난히 힘들게 하는 작품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독 힘든 문장과 표현이 있을 것입니다. 스토리 자체보다는 등장인물의 섬세한 감정선 변화를 따라가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이나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의 미묘하게 어색한 한국어 표현으로 극을 끌어가는 영화 <헤어진 결심>을 대표적인 예시로 소개했습니다. 아마 모든 번역가들이 문장의 완결성도, 미묘한 표현에 대한 번역의 맛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작업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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