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사업을 하고 싶소.
이 사업은 문화 사업이에요.”
장업계와 태평양의 번영을 위해, 출장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가던 장원은 아무리 일정이 빡빡하고 고단해도 그 나라의 문화와 자연을 마음에 담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커피와 차를 마시며 숨 돌릴 틈을 찾곤 하던 장원은 이국의 문화들을 접하면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나라건 차에 관한 애정이 대단히 크다는 점이었다. 특히 고려, 조선 시대의 다완(茶碗)을 매번 감동한 듯 파고드는 일본을 보면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사라진 것이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원은 차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 태평양의 소명임을 실감하며 결심에 이른다. 융숭하던 차 문화가 사그라진 이 시점, 다시 그 시대의 차 문화를 초록빛 재배를 통해 복원해 보자고. 태평양의 사업, 제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과는 비껴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음에 문화의 씨앗을 깊숙이 심은 것이다.
1979년 어느 날, 장원은 태평양 사옥에서 긴급 경영 회의를 열고는 선언했다. “녹차 사업을 하려 하네. 서항원 이사가 실무를 맡을걸세.” 농대를 나와 효소를 공부하느라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서항원 이사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말문이 턱 막혔다. 차 사업이 잘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을뿐더러, 일본 유학 시절 말차가 입에 맞지 않아 입에 댄 적도 없는 그로서는 본인이 맡을 직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나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이 해내고 마는 장원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는 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장원이 미리 검토하고 건넨, 손때 묻은 책들을 보아하니 꺾을수록 거세질 의지가 벌써 느껴지는 듯했다. 속앓이하던 서항원 이사 주위엔 반대하는 임원진이 상당했다. 차밭은 취미생활이라고, 차밭을 일구기 시작한다 해도 10년은 돼야 승부가 날 거라 말하는 이가 적지 않던 것이다. 하지만 장원은 시간을 들이는 게 자연의 이치기에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고,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차근차근 진용을 갖추면서 차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먼 미래에 닿아 있었다. 사업에의 성공이 아닌 문화와 전통을 지켜낸 미래에. 자연의 법칙을 따라 시간을 머금고 자라날 차밭을 상상하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녹차는 당분간 돈하고는
그렇지만 사업이 성공하면 태평양은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얻을 것이오.”
차밭을 조성할 부지를 살피면서 100여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가 이어졌다. 숱한 서류와 국내외 연구 논문을 살피느라 장원과 실무진은 24시간이 부족했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 장원은 너른 차밭을 꿈꾸며 몇십만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사들였다. 그러자 국세청과 주무 관청에서 연락이 빗발쳤다. 태평양에서 땅 투기를 한다는 의혹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장원은 역경 없는 곳에서는 성취도 없다는 걸 일찍이 겪어온 사람이었다. 숱한 의혹과 억울함에 맞서며 실무진의 사기를 북돋웠고, 결국 험로를 거쳐 2만 5천 평의 땅을 매입했다. 또한 그간 배우고 축적한 지식을 토대로 개간을 진행했다. 개간은 고통스러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인부의 얼굴, 상처투성이인 다리, 껍질이 다 일어난 손…. 장원은 피와 땀을 흘려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결심했다. 이 고로를 잊지 않고 꼭 이 푸른 문화를 일으켜 세우겠노라고.
그러나 기술이 발달하고 천지가 개벽한들 차밭이 하루아침에 완성될 리 만무했다. 땅을 개간하여 차나무를 심고 수확하는 데는 짧아도 3~4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 반드시 재배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을뿐더러, 성공할지라도 찻잎으로 제품을 만들기까지는 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장원이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를 탓하며 뒷걸음질 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잘 알았다. 장원의 마음에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는 장원의 노고를 향긋하게 탈바꿈해주었고, 그는 이내 희망으로 한 발짝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그리고 직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는 여전히 오뚝이라고. 분명히 다시 일어서도 또 도전할 거라고.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또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숱한 난관을 넘어 이제야 차 농사가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 장원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이번에는 기후라는 난제가 찾아왔다. 땅, 자금, 사람은 직접 맞서며 해결해 볼 수 있었지만 서리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후에 맞서기 위해 장원과 실무진은 10년이란 세월을 분투했다. 처음에는 차밭 직원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차밭을 돌봤고, 옛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 서리를 방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실천해보기도 했다. 일본 다원에서 사용하는 팬도, 미국 오렌지 농장에서 쓰는 대형 팬도 설치해 보았고, 스프링클러로 미리 새순에 물을 뿌려 살짝 얼게도 해보았다. 장원과 실무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마침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지하수를 개발했고 이로써 가뭄을 해결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차 사업이 너끈히 성공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차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1980년대 말까지도 적자였다. 다원이 하나둘 망하고 차 문화가 사라져가는 한국에서 막대한 양의 차나무 묘목을 구할 방도가 없어 사방팔방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다 대만과 일본에서 들여왔고, 제주와 강진을 오가며 천혜의 땅에 초록이 움틀 것을 손꼽아 기다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듯, 이루 말할 수 없이 용감하고 우직한 그의 모습은 차밭 곳곳에 남아 거름이자 용기가 되었다. 이토록 지난한 싸움이 있었기에 장원은 찻잎을 수확하는 순간, 그 누구보다 진한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단단한 신념에서 피어오른 희망의 싹은 ‘설록차’로 그 탄생을 알렸고, 다시금 우리에게 녹차 문화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사회 사업이자 문화 사업인 그것, 한국의 끊어진 차 문화와 전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 장원이 품은 소망엔 건강과 문화를 향한 깊은 향기가 응축돼 있었다. 우리의 건강으로 이어지는 귀한 내음이.
Editor’s Epilogue
매일매일 작은 성과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목표를 들여다보자. 가볍게 포기하고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있는 반면,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다고 간절해지는 목표도 있을 테다. 산의 정상에 단숨에 오르는 것은 초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다. 당장은 꼭대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향해 발을 떼는 매일의 작은 성취가 중요한 법. 어느 해부터인가 ‘챌린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외국어, 댄스, 산책, 운동 등 종목도 장르도 다양한 매일매일 챌린지. 아주 작은 성취를 하나씩 만들어가다 보면 오래 품어온 포기할 수 없는 목표에 너끈히 당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령, 하루에 열 개씩 외국어 단어를 외운다면 한 달이면 300개, 석 달이면 1000개에 육박할지니 외국어 향상에 분명한 자양분이 될 터. 매일매일 해낼 수 있는 작은 챌린지를 정해보자, 더 큰 목표에 차분히 닿을 수 있게.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진행 어라운드
평전 개정판 수류산방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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