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장은 오뚝이야!”
프랑스와 유럽에서 고운 꿈과 선명한 청사진을 품고 돌아온 1960년, 장원의 마음엔 그윽한 꿈의 향기가 가득했지만 1960년대는 그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시절이 아니었다. 발톱을 전부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발을 잔뜩 오므린 맹수 같은 역경이 하나씩 찾아온 탓이었다. 프랑스의 코티사와 기술 제휴에 행복감을 누린 것도 잠시, 제조의 핵심 노하우인 성분의 종류와 구성 비율은 공유할 수 없다는 선언에 코티분 개발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당시 기술 제휴 승인 부처이던 상공부에서는 ‘이게 무슨 기술 제휴냐’는 볼멘소리가 이어졌고, 이를 잠재우기 위해 동분서주 설득하며 갖은 고민과 연구를 이어나간 장원은 결국 당국의 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잠시, 상황은 녹록지 않게 흘러갔다. 기술 밀수를 했다면서 트집 잡기 시작한 경쟁사나 곳곳에서 등장한 온갖 가짜 코티분에 씁쓸한 침을 삼켜야 했던 것이다. 지난한 과정이 반복되었지만 장원은 거센 폭풍에도, 줄기차게 내리는 굵은 빗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행여나 연구원들이 휩쓸릴까 버팀막이 되기를 자처했고, 우산을 씌우며 정직하게 활로를 모색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이룩해낸 ‘코티분 시대’. 국산 화장품 업계를 한 단계 성장시킨 태평양의 놀라운 전환기였다. 그러나 장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 장원이 다음으로 집중한 것은 외제 화장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고객으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이 고품질의 화장품을 대용량으로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때라는 걸 확신했다. 대규모 공장이 그의 청사진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순간이다.
“장원에게는
무한한 충성심을 갖게 해주는 어떤 힘이 있으셨어요.”
까다롭고, 신중하고, 섬세하기까지 한 장원은 공장을 세울 만한 좋은 땅이라면 밤낮 할 것 없이 찾아다녔다. 몇 번의 고전 끝에 영등포구 신대방동에서 비로소 탄성과 환호를 담은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곳이다!” 1962년 5월 3일, 허허벌판에서 공장 기공식을 지낸 태평양의 소식이 퍼져나가자 당연한 수순처럼 이러저러한 말들이 따라붙었다. 그것은 장원을 향한 기대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무모하다며 혀를 차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비난이 비수처럼 꽂힐 때도 있었으나 장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난이 있으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했지만 강단 있는 태도로 위험을 무릅쓴 데는 험로에서 빛나는 창조를 이룩해낼 수 있을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험의 끝엔 반드시 창창한 미래가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매번 현실이 장원의 편인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부지에 공을 들인 공장 건설이 이어지면서, 내부에선 자금이 부족하다는 연락이 빗발쳤다. 태평양의 깊이를 더해 나가는 시간을 가로막는 또 한 번의 위기였다. 이제는 사채밖에 답이 없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밤, 장원은 아내에게서 묵직한 유리병 하나를 건네받는다. “내가 일하느라 바빠 돈 쓸 일도 없고 틈틈이 재미 삼아 사 모은 겁니다.” 그 안에는 금가락지가 함빡 담겨 있었다. 장원은 현명한 아내와 단단한 신뢰를 쌓은 거래처들의 도움으로 급한 불을 하나씩 꺼뜨릴 수 있었다. 태평양의 불길한 조짐에 불안해하던 신입 사원도 물론 있었지만, 이미 장원의 사업 수완과 인품에 확신을 품은 직원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사장은 오뚝이야!” 무엇보다 인간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한마디였다. 미용연구실 황혜숙 상무는 장원을 “무한한 충성심을 갖게 해주는 어떤 힘이 있는 분이셨다.”고 회상한다. 그 당시 장원과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태평양에, 화장품에, 장원에, 그의 선택에.
“기술은 진보한다.
그리 큰 미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멈추면 뒤지는 게 기술이다. 멈추지 말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어려움의 고개를 넘고,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 나가는 데 보답이라도 하듯 마침내 영등포 공장이 준공되었다. 1962년 11월 20일의 일이다. 대지 6,849평, 건평 1,700평.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유화기와 원료 탱크, 포장 시스템까지 완비된, 과연 장원의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공장다운 공장이었다. 자동화 시설로 현대화를 이룬 모습은 장원이 프랑스 코티사에서 감명받은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꿈을 향해, 장원은 보란 듯이 속도를 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탄탄한 연구소와 특출한 연구원들이 준비된 그 무렵, 장원은 지금이라면 늘 마음에 품어온 식물이 가진 힘을 화장품에 녹여볼 수 있으리란 결심이 섰다. ‘인삼 화장품을 만들어 보자!’는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 믿은 것이다. “몸에 좋은 인삼을 피부에 바른다면 어떨까? 그래, 다른 나라에서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자.” 어깨를 다독이는 듬직한 기운과 연구원을 이끌어 나간 포용력, 그리고 리더십. 그 끝에 시제품화에 성공한 ‘ABC 인삼크림’이 탄생했고, 이후 사포닌을 화장품 제형으로 안정화한 ‘진생삼미’ 개발에 성공한다. 수출의 활로를 열어준 이 제품은 날개를 달고 더 멀리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열어낸 장원. 그는 자신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귀한 인재들이 자신의 둘도 없는 자원이라 믿었다. 연구원들의 생활과 안정을 성심껏 돌보는 데 소홀히 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제 막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을 위해 연구소를 수도권에 두기로 결심한 것 역시 연구원들을 속속들이 헤아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직원들은 이 시절을 회고하며 말한다. “사장님이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연구실이 커질 때”라고. 영등포 공장 준공 이후 두 차례나 증축을 이루고 추가 부지를 매입하며 안팎으로 입지를 다져 나가는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새 길로 뛰어든 선택이 행복으로 물들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진실일 것이다. 선견지명으로 빛나는 미래를 개척해 나간 오뚝이 장원 뒤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장원의 너른 품을 몸소 느낀, 믿음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 꿈을 향해 우뚝 서는 기개, 사람을 향한 온화하고 친절한 태도,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꺾이지 않던 참다운 열정. 우리는 기억한다. 장원이라는 오뚝이가 가진, 잊을 수 없는 이 면면을.
Editor’s Epilogue
나를 일으키는 한마디
장원은 함께 화장품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항상 귀히 여겼다. 사업을 위한 열망이기도 할 테지만, 발맞춰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마음의 힘이 컸으리라. 장원이 중요하게 생각한 태도 중 하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는 한마디임과 동시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었을 테다. 어릴 때와 달리 많은 걸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성인이 된 지금, 마음이 약해지거나 확신이 서지 않아 누군가의 한마디가 절실해질 때가 있다. 기다렸던 따듯한 말 한마디가 들려올 때, 결속력이 단단해지고 나아갈 동력이 생기는 경험은 누구라도 한 번쯤 해보았을 테다. “잘하고 있어!”라는 상사의 한마디, “밥 먹고 하자.”는 동료의 제안, “오늘도 고생했어!”라는 가족의 인사…. 사람을 위하는 말의 힘을 생각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던 장원을 떠올리니, 누군가 건네온 따듯한 말 역시 나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인 듯싶어 새삼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날이다.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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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개정판 수류산방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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