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더 오래 더 아름답게 일하는 법 #5 실수와 복구로 쌓아 올린 기획자의 태도
글
한다혜 메이크업프로팀
나답게 일하고 싶은 마흔의 시선으로 한 분야에서 꾸준히 쌓아 온 시간 속에서 발견한 깊고 새로운 아름다움(NEW BEAUTY)을 다섯 번의 칼럼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경력이라는 건 생각보다 유약하고 쉽게 틈이 벌어지는 껍질이라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매끈해 보이지만, 손톱으로 슬쩍 긁으면 스르르 벗겨질 것처럼 위태롭기도 하거든요. 그걸 들켜 버릴까 봐 움찔하는 날도 있습니다. 오래 일했다고 해서 실수가 우리를 피해 가는 것도, 경험이 쌓인다고 모든 변수를 예측하게 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아주 사소한 틈 하나에 그동안 쌓아 온 나에 대한 믿음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약한 줄 알았다면 애초에 잘 아는 사람처럼 굴지 말 걸” 하는 자조도 잠깐 스치고요.
작년 이맘때쯤 헤라 유튜브 채널 <색조탐구>의 촬영 장소는 얼핏 단정했어요. 채광은 무표정하게 벽을 스치고,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는 시간이 남긴 자국을 조용히 품고 있었죠. 벽면은 연극 무대의 얇은 세트장처럼 현실이 반 걸음쯤 빗겨 나 있는 질감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크으! 너무 잘 골랐잖아!)

이 시리즈는 레트로 오피스 무드를 기반으로 구성해요
아날로그적 질감과 빈티지 톤을 활용해, 연구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오래된 사무실의 기록’처럼 담아내는 것이 핵심 콘셉트죠!
가끔은 공간이 사람을 조련하는 것 같은 이상한 감정이 드는데, 그날의 스튜디오는 “오늘 촬영 잘 나올 것 같은데?”라고 조용히 부추기는 공간이었어요. 수많은 배경 속에서 쇼트를 구성해 오며 그런 풍경을 좋아하게 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물들 사이 가만히 온기가 생기는 느낌... 존재감이 과하게 발화하지 않는 공간에 생기 있는 인물을 배치하고, 앵글의 숨을 고르며 오브제를 만지작거리는 시간… 완벽하게 사랑하는 순간들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이번엔 어디서 틀어질까?”라는 예감이 스윽 듭니다. 촬영은 늘 어딘가 비어 있고, 그 빈틈은 생각보다 성실하게 제때 나타나거든요.
이번에는 전철 소리였습니다. 벽을 아주 얇게 타고 들어와 대화의 결을 툭 잘라먹는 진동이 주기적으로 지나가고 있었죠. “이건 좀 큰데…” 하는 직감은 분명했지만,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체념, “에이 뭐… 그냥 밀지 뭐” 하고 제 등을 슬쩍 떠밀었습니다. 초년생 때의 설렘과 긴장은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 아래 옅어져 있었고요.
2 사람의 온도가 화면에 스며드는 지점에서
그날은 박사 출신의 색조 연구원 지영 님이 ‘센슈얼 누드 밤’을 개발한 후, 게스트로 출연한 촬영이었습니다. 시리즈의 명 MC이자 기술소통의 대명사인 연구원 경진 님이 몇 번의 거절을 이겨내고 섭외를 해 오신 덕분이었죠. 연구실의 언어는 본래 실험과 실패와 기록을 견디며 정제되는 말이라, 사람이 말하는 속도로 번역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시간을 설레며 기다리는 쪽이에요. 숨을 고르고, 리듬을 맞추고, 말의 결이 사르르 풀리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죠.
중반 즈음, 대화에 리듬이 생기던 지점에서 지영 님이 툭 말했습니다.
“세라마이드는 자기들끼리 너무 친해요. 그래서 (손으로 갈라내는 시늉을 하며) “너네 떨어져 있어”라고 해야 돼요.”
그 말은 전문적인 세계가 갑자기 나를 향해 주파수를 맞추는 그 특유의 투명한 순간이었어요. 너무 과학적이고, 너무 귀엽고, 너무 대중적이라 저는 잠깐 숨이 멈췄습니다. ”아, 오늘은 정말 잘 됐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며칠 뒤 파일을 열기 전까지는요.

모두가 웃고 있고,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그날.
벌어질 일을 몰랐던… 그 찰나의 평온.
편집 프로그램을 켜자마자 전철의 덜컹거림들이 먼저 머릿속에 스쳤어요. 예감은 늘 정직하더군요. 아… 오디오 파일이 사라져 있었어요. 무선 마이크에 잘 잡혀야 했던 음성은 자취를 감췄고, 카메라 내장 마이크에는 물속에서 부서지는 잔향만 남아 있었습니다. 지영 님의 목소리는 잡음 뒤편에서 겨우 형태를 유지하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어요. (…아악)
편집실에서 그 파일을 다시 들었을 때, 저는 제 일의 가장 내밀한 바닥을 마주했습니다. 누군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 그 순간의 저는 ‘침착한 기획자’라기보다 그냥 ‘허둥지둥하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사실은 그게 제 본모습이기는 합니다.)
3 균열을 복구하는 마음의 지구력
이상하게도 머리가 차가워지며, 후회보다 먼저 떠오른 건 질문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디까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일까."
기획자의 시간은 예측이 맞는 날보다 어긋나는 날이 훨씬 많고, 어제의 감각이 오늘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결국 실력을 가르는 건 실수를 피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수 이후에도 나를 얼마나 오래 붙들어둘 수 있는가’라고 믿어요. 그게 지구력이라는 걸 또렷하게 배우며 일해 왔죠.
저는 사운드 후반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몇 번의 정중한 거절과 애매한 반응 끝에, 한 분이 말했어요.
“음…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아요.”
그 말은 거의 구원의 기척처럼 들렸습니다. 전철 소리를 한 겹씩 벗겨내고, 흩어진 목소리의 주파수를 다시 세우는 일은 며칠이 걸렸어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형태가 다시 세워지는 걸 보며 ”깨진 목소리도 목소리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받아들였습니다.
균열이 남아 있었지만 그날의 공기는 정확한 온도로 되살아났습니다. 일은 종종 그 불완전함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또 일하는 하루에서 어떠한 문장을 하나 더 남기게 되었습니다.
4 다시 이어붙이는 사람으로
그 이후로 작은 의식들이 생겼습니다. 스튜디오 방음 체크, 테스트 녹음, 백업 확인. 예전에는 이런 절차를 ‘조심성’이라고 불렀겠지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그건 실수를 피하려는 방어가 아니라, 무너진 순간을 다시 이어붙여 본 경험들이 남긴 결심에 가까웠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과정들이 제 업력의 진짜 무늬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력보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는 선명하게 아는 패턴 말이죠.
요즘엔 장비를 세팅하다가 이유 없이 가만히 멈춰 섭니다. 어디선가 아주 작은 틈이 스윽 지나가는 느낌이 스칠 때가 있거든요. 언제나 그 틈은 또 찾아올 것이고, 저는 또 그것을 조용히 자책하며 주워 담겠죠. (흑흑) 그 생각을 하면, 묘하게 심장이 툭 흔들리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일할 것 같습니다. 멀쩡히 균형 잡힌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내밀한 마음의 진동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가끔은 요령 있게, 가끔은 우스꽝스러움을 들키며 흔들리면서도 결국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으로요. 부서진 순간을 껴안고 다시 조립해 보는 그 조용한 과정 속에서 저는 계속 일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약간 먹먹한 오디오… 영영 아쉽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OUTRO
이번 칼럼 시리즈를 5회차로 마무리하며, 제가 일과 함께 지나온 마음들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읽어주신 분들,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주신 분들 덕분에 이 글들이 혼자 쓴 기록이 아니라,'같이 지나온 풍경'처럼 느껴졌어요. 꾸준히 쓰는 일은 늘 예기치 않은 선물을 줍니다.
저에게는 이 칼럼이 그랬어요. 지면을 내어 주셔서, 제 하루의 온도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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